블로그 전문 “이글루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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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rilee | 2009/02/19 15:41

현기증

여긴 어찌된 속인지..모든게 오픈된듯 보인다..
내가 지닌 모든 자료가 투명 내장처럼 파헤쳐져 있다..
내눈엔 보이는게 남의 눈엔 안보이는 걸까?...정말일까 그게..

오늘은 몹시도 머리가 시끄러운 날이였다..
머리가 시끄럽다고 감정또한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을 것인데..그러나 그 둘이 비례하듯이..
시뮬라르크의 도가니...그것이 감정을, 아니면 내 한곳의 빈 구조를 울리듯 웅웅거린다.
세차게...

생각을 끊어보기로 한다.
모든  감각을 신체에 집중시킨다.
그래도 괴롭다.
신체가 괴롭다.
무서운 충의 효과...이제 정말 혼자인듯 하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날듯 ..그리고 난 아직 나의 길위로 진입하는 법을 모른다.

시간은 아직 내게 기다리라고 고개짓을 한다.
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숙응되지 않는 내 머리한쪽은 그곳에 난 세치만큼이나 하얂다.

by kyurilee | 2009/02/17 07:51 | 수면에서 허덕거리다 | 트랙백

머리가..

옮겨놓기는 했는데..
뭔가가 아주 복잡해서...

쩝....글쩍...
데이타를 잃어버리는 건 왠지 막아야 될것 같아서 옮겼는데..나는 엠파스가 나에게 맞는듯 싶다..
복잡한건 싫어요....!!

by kyurilee | 2009/02/10 01:39 | Rue de montreuil 92 | 트랙백

투르니에의 로벵송, 방드르디.

지각에서의 타인의 효과  ㅡ l'autre
일탈은 충동체계에서의 욕구의 힘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일탈자는 욕구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다른 체계 안에 욕구를 도임하고 그 체계
안에서  내적인 극한, 잠재적인 핵, 또는 영점 ㅡ< 유명한 사드의 무감각 >ㅡ 의 역할을 하게 만드는 자이다.
일탈자는 더 이상욕구하는 자아가 아니며, 대타< l'autre > 는 그에게 더 이상 실존하는 욕구 대상이 아닌 것이다.
 
투르니에의 소설은 일탈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소설도, 인물들을 다르는 소설도 아니다.
왜냐하면 타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적인 분석을 취하는 소설도 아니다. 로뱅송은 내면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방드르디"는 놀라운 희극적 모험 소설이며 수 많은 영고성쇠를 포함하는 우주적 소설이다.
그것은 일탈의 주제대신 로뱅송, 즉 타인 없이 섬속에 버려진 인각이라는 주제를 펼치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 주제는 하나의 가정된 시원을 끌어들이는 대신 모험들을 제시하는 한에서 <"타인 없는 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선 타인이 그의 효과들을 통해 의미하는 것을 찾을 것이다, 사람들은 섬에서의 타인 부재가 야기시키는 효과들을 찾을 것이고, 타인이 무엇인지 또 타인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부재가 가져오는 효과들은 정신의 참된 모험들이다. 이 점에서 "방드르디"는 추론적인 실험소설이다.
그래서 철학적 반성은 이 소설이 그토록 생생하고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을 집약해야 할 것이다.

타인의 첫번째 효과+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대상과 생각하는 각각의 관념 주위에서, 여분의 세계, 연결 장치, 바탕을 조직한다는 점이다.

이 조직화로부터 일정한 이행 원리에 따라 다른 관념들과 대상들이 나온다.
나는 하나의 대상을 본다. 그리고 그로부터 눈을 돌린다.
그러면 그 대상은 다시 바탕으로 되돌아가며, 동시에 그 바탕으로 부터 내 눈을 사로잡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난다.
이 새로는 대상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난폭하게 나에게 부딪쳐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최초의 대상이 내가 미리
그 존재를 감지했던 하나의 여백을, 내가 이미 현실화할 수 있었던 잠재성들과 잠재력들의 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분의 실존을 그렇게 인식하거나 감지하는 것은 오직 타인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에게 타인은 흐트러짐을 유발시키는 요인이다, 그것은 타인이 우리를 끊임없이 뒤흔들고  우리의 지적인 사고를 뽑아버리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직 그의 예기치 않은 등장의 가능성만이<우리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지만 언제라도 눈앞으로 
나설 수 있는> 대상들의 세계에 희미한 빛을 던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32쪽>

대상에서 내가 보지 못한 부분, 그 부분을 동시에 나는 타인이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정립한다.
내가 대상의 숨겨진 쪽을 보기위해 돌아가면, 나는 대생 뒤에서 타인을 만나게 되고 타인의 봄과 나의 봄이 합쳐질 때
대상의 총체적 봄이 달성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내 등 뒤의 대상들은 타인이 <그들을> 볼 수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며, 
나는 그들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이 깊이<이 깊이에 따라 대상들은 서로 겹치고 침투하며, 서로가 서로의 뒤에 숨는다.>
를 나는 타인을 위한 가능한 크기<여백>, 대상들이 그 안에서 <다른 깊이의 관점에서>배열되고 정돈되는 크기로서 본다. 
요컨대 타인은 세계 안에서 여백들과 전이들을 확보해준다.

타인은 근접성과 유사성의 감미로움이다. 
타인은 형태ㅡ배경의 변환과 깊이의 변이를 규제한다. 
타인은 뒤에서의 공격을 막는다.
타인은 관대한 풍문의 세계에 정착한다. 타인은 사물들이 서로에게 기울도록 해주고, 서로 자연스러운 보완물을 찾도록 해준다. 
우리가 타인의 심술을 불평할때, 우리는 보다 끔찍한 심술, 타인이 없을 경우 사물들이 드러낼 심술을 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알려지지 않는 것, 지각되지 않은 것을 상대화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위해 내가 지각한 것 안에 지각되지 않은 것의
기호를 도입해주고, 내각 지각하지 못한것을 그에게 지각 가능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의미에서, 
나의 욕구가 운동하는 것, 내 욕구가 하나의 대상을 수용하는 것은 늘 타인을 통해서이다.
나는 가능한 타인에 의해 보여지거나 생각되거나 소유되지 않는 어떤 것도 욕구하지 못한다. 이것이 내 욕구의 토대이다.
내 욕구를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늘 타인이다.

세계속에 타인이라는 것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직 하늘과 땅의,  견디기 힌든 빛과 칠흑빛 심연의 거친 대립이 있을 뿐이다.
"전부 아니면 무라는 단적인 법칙"이 있을 뿐이다. 인식된 것과 인식되지 않은 것, 지각된 것과 지각되지 않은 것이 거친 전투
 속에서 절대적으로 맞부딪친다. "섬에 대한 나의 봄\시각은 그 자신으로 환원되며, 내가 밑 바닥 없는 밤을 지매할 수 없는 곳에
있을 때마다 보게 되는 것은 절대적 비인식일 뿐이다."<47쪽>


타인의 현존과 부재가 가져오는 효과들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타인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이란 나의 지각장 속에 놓여 있는 하나의 대상도 아니고 나를 지각하는 하나의 주체도 아니다.
타인은 무엇보다도 지각장의 한 구조이다. 타인이 부재할 경우 이 장은 하나의 전체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이 구조가 실제 인물들, 
가변적인 주체들에 의해서만<나에 대한 당신, 당신에 대한 나>현실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이 조직화 일반의 조건으로서 
각각의 조직된 지각장<나의 지각장, 당신의 지각장<속에서 그것<구조>을 현실화해주는 항들<인물들, 주체들>
에 앞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절대적 구조로서의 a priori<선천적으로 선험적으로>한 타인이 각 장에서의 구조를 
현실화하는 항들로서의 타인들의 상대성을 근거짓는다.

그러나 이 구조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의 구조이다.
내가 타인이 표현하는 것의 실재를 포착할 때
역시, 나는 타인을 펼칠 뿐이며 상응하는 가능 세계를 현실화시킬 뿐이다. 타인이, 다름 아니라 말함으로써 이미 그가 내포하고
있는 기능들에 어떤 실재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타인이란 내포된 가능의 실존이다.
언어는 가능 자체의 실재성이다.
자아는 가능들의 펼쳐짐, 현실적인 것 안에서의 그들의 실현 과정이다.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알베르틴은 자신이 해변과 파도의 부서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또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해도, 내가 그녀를 표상할 수 있었을까? 우주의 어느 곳에서 나를 구분했을까?" 사랑, 질투는 알베르틴이라는
이름의 이 가능 세계를 펼치려는 시도일 것이다.
요컨대 구조로서의 타인은 가능 세계의 표현이며, 그를 표현하는 것 바깥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는
표현된 것이다.
"이 사람들 각자는 충분히 정합적인, 그 가치들과 밀고당기는 중심 그리고 무게 중심을 갖춘 하나의 가능 세계이다.
서로 상이하지만 이 가능 세계들은 결국 섬이라는 작은 이마주를 가진다.  얼마나 두루뭉실하고 피상적인가|
이 이마주를 둘러싸고 가능 세계들이 조직되며, 그 이마주의 구석에서 로뱅송이라는 조난자와 그 혼혈 시종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이마주가 핵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각 가능 세계에서 일시적인 기호에 의해 표식되었으며, 
<하얀새><Whitebird>의 우연적인 진로 변경이 그를<이마주를> 끌어내었던 무 안에서의 짧은 연기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 가능 세계 각각은 그의 실재성을 소박하게 주장했다. 그것은 타인이었다.
실재로 이행하려고 몸부림치는 하나의 가능."<192쪽>

ㅡ의미의 논리 ㅡ478쪽 부터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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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rilee | 2008/11/24 22:13 | 7월 그무월의 계절 | 트랙백

교환과 반복

(La vie se réitérant pour se resaisir dans sa chute, comme retenant son souffle
dans une appréhension instantanée de son origine;
mais la réitération de la vie par elle-même resterait désespérée sans le simulacre de l'artiste qui, à reproduire ce spectacle,
arrive à se délivrer lui-même de la réitération.)



{삶은 마치 그 뿌리의 순간적인 포착속에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한 것처럼
추락속에서 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반복한다. 그러나 삶의 자발적인 반복은 이 광경을 재생산하기 위해
반복으로부터 몸을 빼내기에 이른 예술가의 시뮬라크르 없이는 헐벗은 것으로 머무른다.}
ㅡ 의미의 논리 ㅡ질들뢰즈

원본의 글이 매끄럽게 해석ㅤㄷㅚㅆ다고 생각이 들지 않네요..
하긴 저 추상적인 이야기를 몇문장에 담을려면 쉽지 않겠지요..

반복으로 구원하는 반복에 대한 이상한 테마..

클로소프스키의 수플뢰르라는 소설에 주인공 로베르트는 [오늘 저녁의 로베르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두 로베르트로 분할된다. 그런데 그녀가 너무나도 정확히 반복한다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면, 반복은 그 목적에 미치지 못할것이다. 그녀가 악한 역할을 하고 실수를 저지를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풀기 어려운 딜레마일까?
아니면 두종류의 반복을,
그릇된 반복과 참된 반복,
절망적인 반복과 희망적인 반복,
구속하는 반복과 해방하는 반복,
모순되는 규준으로서 정확성을 가지는 반복과 다른 규준들에 답하는 반복.
을 상상해야 하는 것일까?..

들뢰즈 또한 반복에 대한 고민속에서 명확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게 아닐까 싶다.
그가 던진 질문들 속에서 그리고 그가 유도해 가는 그 많은 참고자료에서..
그의 글은 좌우로 널펴가면서 위아래의 깊이를 동시에 꽤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 하게된다면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버리기도 한다.
내가 저위의 글을 읽을 순간은
버스를 기다리던 고가도로 밑이었다.
실실쪼개면서 머릿끝까지 쭈빗거리던 소름을 기억한다.

한 몇칠을 신을 원망했었다.
무슨 신이냐고?..나는 인간이 만든 인간화된 신을 믿지 않는다.
내가 원망한 신은 물리적인 신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도 인간이기때문에 그 물리적인 신에게 '개새끼' 라는 말을 지꺼리면서
욕설을 퍼붓는 모순..신은 죽었다는 니이체가 완벽히 이해되던 순간..
나는 그가 거쳐갔던 그 상황..회복기...
회복기의 환자다. 아직 얼마가 더 걸릴지는 알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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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rilee | 2008/11/10 06:42 | 7월 그무월의 계절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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